/김명화 교육학박사·동화작가
올해의 색은 누가 선정하는가? 수많은 색을 제치고 하나의 특정한 색이 유행을 선도한다고 예견하는가? 팬톤 색채연구기업이 매년 12월에 다음해의 색을 선정하고 발표한다. 코로나 19가 3년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색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2022년도 팬톤 컬러는 17-1928의 선택은 ‘베리 페리’는 블루 계열에서 보라색 레드가 가미된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컬러를 제시하면서 이와 함께 어울리며 서로 지지하고 강화라는 색을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보라색 물결이 도심을 유혹하고 있다.
립스틱 효과란 말이 있다. 불황기에 최저 비용으로 품위를 유지하고 소비자의 심리적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상품이 잘 판매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적은 비용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연출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 마스크를 쓰면서 립스틱의 판매량은 줄었지만 스킨케어, 향수, 눈 화장에 대한 매출이 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는 사람들은 불황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매년 새롭게 색은 탄생하고 인테리어, 의상, 모든 것들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색에 대한 탐색을 해야 하는가?
독일의 어린이 수업을 보면 색의 본질을 찾게 한다. 본질의 색은 자연에서 찾는 것이다. 산책과 놀이를 통한 수업은 자연과 함께 한다.
독일 유치원 아이들의 해바라기 그리기 과정 수업은 해바라기를 자연에서 가져와 꽃잎을 하나씩 해바라기 꽃 모양에 붙이게 한다.
해바라기 꽃잎을 붙인 옆에 해바라기 꽃과 가장 비슷한 크레파스 색을 골라 똑같이 그려 해바라기 꽃을 완성한다. 이러한 이유는 색의 본질을 찾게 하는 것이다.
색의 본질을 통해 색을 알고 탐색하게 하는 과정을 해 본 후 자신만의 해바라기 꽃을 연출해 본다. 자연의 본질을 알게 하는 교육은 색 탐색의 기초가 된다.
계절은 어느덧 5월의 마지막 날이다. 장미꽃은 지고, 담장 너머로 살구는 누렇게 익어가고, 보리수나무 열매도 자신의 색을 얻었다.
자연은 매번 다른 색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색을 낼 수 있을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은 다양한 색을 연출한다. 꽃이 주는 아름다움을 넘어 열매의 색은 더욱더 놀랍게 한다. 자연은 똑같은 색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과 숲으로 가면 다양한 색의 향연을 만나게 된다.
자연의 색을 매년 다른 색으로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에 유럽의 아이들은 숲에서 나뭇잎 패턴 놀이 활동을 한다. 나뭇잎으로 색의 배열을 해보고, 일대일 대응 놀이를 통해 자연의 색을 탐색하게 한다.
나뭇잎 놀이 활동으로 색 배열, 배색, 색채, 색감을 자연스럽게 찾게 하는 놀이를 통해 색을 탐색하게 하는 놀이는 유럽의 스웨터의 다양한 무늬를 보고도 알 수 있다.
밥 햄블리의 ‘컬러애 물들다’ 라는 책에서 소개하는 자연의 색을 신비롭다.
‘이색적인 해변의 색을 찾아서’을 보면 다양한 모래의 질감과 색깔은 해변에서 나오는 천연물질에 의해 결정되는데 모래해변이 밝은 크림색인 이유는 구성 물질이 햇볕에 색이 탈색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리브해, 그리스, 스페인에는 핑크빛 해변이 있다.
핑크빛 해변은 핑크빛 껍질의 유공충으로 인해 핑크빛을 뛰며, 검은 모래 해변은 화산 광물과 용암 파편으로 이루어져 그러한 색깔을 낸다.
하와이의 하얀 모래 해변은 하얀 모래는 파랑비늘 돔의 배설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은 상상을 넘어선 조화를 통해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낸다.
색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자연의 색을 계속 찾아갈 뿐이다.
자연의 색을 찾기 위해 화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액자에 담는다. 자연을 그림 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의 일부를 그림으로써 보여주는 것이다. 밀레가 그랬고, 고흐가 그랬으며, 모네가 그러한 발자취를 보여주었다. 이제는 사진예술을 대신하기 때문에 화가는 다른 시선을 담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알랭드보통의 ‘여행의 기술’에 워즈워드의 시 영생불멸의 노래의 시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영감을 다시 한 번 노래하게 한다.
‘한때 그렇게 빛나던 광채가/ 지금 내 눈에서 영원히 사라진들 어떠랴,/ 풀의 광휘의 시간, 꽃의 영광의 시간을/ 다시 불러오지 못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