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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처음부터 남자가 더 많이 피웠다?
  • 호남매일
  • 등록 2022-07-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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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습관이 배면 잊을 수 없어 상사초(相思草)라고 불렸다. 그만큼 담배는 묘한 중독성이 있어 맨발로 산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끊기가 힘들었다. 담배가 권위, 멋, 소통의 상징으로 통용됐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남성들의 흡연은 거침이 없었다. 그 시절에 담배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을까.



◇타바코→담바구→담배



담배는 영어로 ‘tabacco’라고 한다. 우리가 부르는 ‘담배’라는 이름은 ‘타바코(tabacco)’가 일본을 거치면서 ‘다바코’가 되고 우리말로 바뀌는 과정에서 ‘담바구’, ‘담배’ 등으로 변한 결과다. 담배의 별명은 다양해서 남초(南草), 남령초(南靈草), 담바고(淡婆古), 망우초(忘憂草), 심심초 등으로 불렸다.담배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담배는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유럽을 거친 후 인도양을 건너 일본 또는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대체로 17세기 초 광해군 때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것이 통설이다.



◇아무나 피울 수 없었던 사치품



1945년 9월 광복의 기쁨을 기념해 ‘승리(勝利)’라는 담배가 출시됐다. 승리는 우리나라 기술진이 만든 최초의 담배였기에 감격이 더 컸다. 승리는 여러 가지 언어로 표기돼 있는 점이 특징이다.


가격은 3원(얼마 후 5원으로 인상), 길이는 6cm. 아무나 피울 수 없을 만큼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당시 쌀 한 말 가격이 45원. 승리는 1947년 5월까지 생산됐다.


승리가 나올 무렵 가장 애용했던 담배는 ‘풍년초’다. 쌈지 담배라고 한다. 풍년초는 잎담배 썬 것을 봉지에 넣어 팔았으며, 곰방대에 넣어 피우거나 신문지에 말아 피웠다.


담배를 파는 곳에서 얇고 누런 색깔의 풍년초용 종이를 따로 팔기도 했다. 그러다 하얀 종이에 깨끗하게 말려 있는 승리가 나오자, 이를 ‘흰 담배’라 불렀다. 네모난 갑에서 하얀 담배를 꺼내는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초기 궐련담배(卷煙:종이로 말아놓은 담배, 즉 종이말음 담배)는 청나라와 일본에서 들여왔다.


1897년부터 청나라 상인들은 주로 ‘칼표’라는 영국 상사의 궐련을 팔았으며, 일본인들은 ‘히어로(Hero)’ 등을 본국에서 가져다 팔았다. 히어로는 일본 무라이(村井) 담배회사가 만든 제품이었다.


한국에서 궐련을 생산·판매한 것은 서울에 살던 일본인에 의해서다. 일본인들은 1905년 연초 공장을 세우고 ‘이글표(매표) 담배’를 생산했다. 비록 일본인이 만들었지만, 우리 땅에서 만들어진 궐련의 효시였다. 이글표 담배는 양절 궐련(막궐련, 필터 없이 종이로 말아놓은 담배)으로 10개비 한 갑에 3전을 받았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이 이 담배를 피웠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민족의 꽃 ‘무궁화’의 이름을 딴 담배가 나왔다.


1948년에는 정부 수립에 맞춰 새벽닭 울음을 뜻하는 ‘계명’이 출시됐다. 1949년 국군 창설 기념으로 최초의 군용 담배인 ‘화랑’이 나왔다. 화랑은 1981년까지 무려 32년 9개월이나 장수했다.195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급 필터 담배인 ‘아리랑’이 나왔다.


특히 1969년에 나온 청자(전통문화를 계승·발전한다는 의미)는 당시 최고급 담배로 애연가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전국에 담배 이름을 딴 ‘청자다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정도였다.


발매 초기 품귀 현상을 빚어 담배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청자는 29년 4개월 동안 애연가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담배를 천 번이나 끊었다



피카소와 헤밍웨이는 시가를 물고 살았다. 처칠, 맥아더, 임어당, 마크 트웨인도 세상이 알아주는 애연가였다.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천 번이나 끊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의 장유가 이름난 애연가였다. 그는 우의정까지 지내고 뒤에 효종의 장인이 된 인물이다.


장유는 문집 \'계곡문필\'에서 담배의 전래 과정과 당시의 흡연 풍속 등을 상세히 설명해 후세에 남겼다. 그는 “담배를 즐기면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으며, 추우면 능히 이를 따뜻하게 하고 더우면 능히 이를 서늘하게 한다”고 적었다.


왕들 가운데는 정조, 고종, 순종이 애연가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도 궐련을 즐겨 피웠다고 한다.근세에는 시인 공초 오상순이 애연가로 유명하다. 그는 ‘꽁초’로 통할 만큼 담배를 즐겼다. 눈 뜨고 잠잘 때까지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았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글자로는 금연이라는 두 자다. 이 두 자를 볼 때는 무슨 송충이나 독사를 보는 것같이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마님 나들이 연비(煙婢) 여종 동행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초기에는 흡연에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이 피웠다. 당시 참고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담배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모양이다.


양가의 마님들은 나들이할 때 항상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든 담배 전담 여종을 뒤따르게 했다. 이들을 연비(煙婢)라고 한다.또 아무 앞에서나 담배를 피워도 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광해군이 궁중에 숙직하는 문관들이 모여 흡연하는 것을 보고는 “입 냄새가 좋지 않다(口不美)”고 말한 것이 계기가 돼 담배에 관한 예법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윗사람 앞에서는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했다.


비천한 자는 존귀한 사람 앞에서, 젊은이는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금물이었다. 맞담배질하는 것을 ‘통죽(通竹)’이라고 하는데, 상전 앞에서 서민이나 하인의 통죽은 금기사항이었다.


이에 비해 일부 기녀들은 양반들과 통죽을 했다. 게다가 담뱃대도 함께 쓰는 특혜를 누렸다.


양반의 담뱃대는 쓰임새가 다양했다. 담배를 피울 때는 물론 아랫사람을 부르거나 꾸짖을 때 때로는 매로도 쓰였다. 쇠로 만든 대통은 무기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남에게 얻어맞거나 의외의 일을 당해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빗대 ‘대통 맞은 병아리 같다’는 말이 생겼다.담배도 세태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흡연자들의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금연이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한때 애용하는 기호품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건강의 적’으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김규회 작가(\'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저자)


한국건강관리협회건강소식 11월호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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