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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우호 증진의 원조 최치원 얼이 깃든 지산재를 중심으로
  • 이태호 광주광역시 남구문화원장
  • 등록 2025-08-12 18:29:37
  • 수정 2025-08-12 18: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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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호 광주광역시 남구문화원장


광주광역시는 광주만의 문화예술의 다양한 매력과 특색을 담아 “2025년을 광주 방문의 해”로 선포하였다. 


광주 남구 양과동 건지산 자락에 신라말 3최로 불리는 대학자이자 문장가로 당대 최고의 “동방의 유종”으로 불리는 고은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지산재(시지정유형문화유산 제10호)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탐방객을 맞고 있다.


12세 어린 나이에 당 유학길에 올라 각고의 노력 끝에 유학 6년 만인 18세(874년)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치러진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하고 20세(876년)에 율수현위에 오를 만큼 학문이 출중했다.


현위시절작품으로 ‘쌍녀분’과 ‘선녀홍주머니’는 중국에서 가장 길고 예술 수준이 높은 고전문학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재능은 난세에 더욱 빛을 발한다.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黃巢)가 당 수도 장안을 점령하자 당시 토벌군 사령관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복무 중 최치원은 황소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일명 ‘토황소격문’으로도 불리는 ‘격황소서’를 쓰게 된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에 귀신까지도 너를 죽이려고 은밀히 의논할 것이다.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는 하나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란 말에 황소가 격문을 읽다 너무 놀라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를 자신의 대표 문집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 수록과 함께 당시 당나라 최고의 문예지인 ‘신당서’에 수록됨으로 “동방의 유종”으로 평가를 받는다. 


현재 중국 역사학자들은 ‘신당서’와 ‘구당서’간 내용이 충돌 시 ‘계원필경집’을 참고할 정도의 귀중한 고증ㆍ고서로 관리되고 있다. 


중국 강소성 양주에는 동방의 대유학자로 칭송받는 최치원이 관직에 있으면서 남긴 많은 업적과 한·중간 우의에 이바지한 공로로 외국인을 대상으로는 중국 최초로 “최치원 기념관”이 설립되어 유명 관광 명소로 자랑하고 있다.


최치원은 884년(헌강왕8) 28세 청년이 되어 16년 만에 귀국한다. 당 황제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할 만큼 능력이 출중함을 인정받았다. 또한 당황제 희종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당시 신라말 국내정세는 진성여왕대에 이르러 혼란이 극에 달하자 혼란수습 타개책으로 ‘호법왕도론’과 사회개혁안인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였으나 진골 등 중앙 귀족의 반대로 좌절된다. 


외직근무를 청하여 대산군(정읍), 부성군(서산), 속함군(함양)태수를 역임 중 위민행정의 대표적 사례로 함양 하천이 자주 범람하자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리고 인공조림을 만들어 오늘날 국내에 가장 아름다운 최초 인공 숲으로 알려진 ‘함양상림’ 이 그의 평소 애민선정(愛民善政)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훗날 자신의 증손(曾孫)인 최승로(崔承老)의 ‘시무(時務)28조’를 통해 고려의 정치 이념으로 실현되어 빛을 발한다. 고운은 898.2월에 41세 나이로 관직을 그만둔 이후 난랑비서, 쌍계사 진감선사비명, 승복사비명, 성주사 남해화상비명, 봉암사 지중대사비명,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석순웅전과 석이정전과 904년해인사 화엄선원에 은거하면서 법장화상전, 부석존자전을 집필한다. 또한 고운의 저서 ‘서산대사 비명’은 승려의 교재로 사용되어 ‘도맥(道脈)의 수장’으로 평가를 받는다. 


생에 마지막 기록으로 908년(51세)에 기울어져 가는 신라를 “불심의 도움으로 반란군 토벌을 염원”하는 “신라 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찬술한 것으로 볼 때 신라에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한 충신이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최치원과 설총을 당나라 이백과 두보에 비교한다. 조선 초 문신 서거정의 ‘동문선’에는 ‘계원필경’을 문장의 ‘개산비조’로 삼으니 이는 ‘동방예원의 본시’라 칭하며 현존하는 최고의 개인 문집이라 평가한다. 또한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이 발휘하고 목은에 이르러 집대성하였다는 평과 함께 고려문신 이규보와 이색도 명문장가로 최치원을 추대하였다. 


조선시대에 신라인 가운데 문묘에 배양된 사람은 최치원과 설총뿐이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2013년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최치원의 한시(漢詩) ‘범해(泛海)’를 인용 “돛 달고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세찬 바람이 만리까지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라고거론하였으며, 이후 서울대에서 진행한 특강에서도 최치원을 한중 양국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최치원을 중점 거론하였다. 


또한 시진핑은 ‘2015 중국 방문의 해’ 행사에서 축하 메시지를 통해 “동쪽 나라의 화개동(지리산 쌍계사와칠불사계곡일대)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라는 시구를 직접 소개하며 한국의 시인 최치원이 한반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렇게 칭송했다고 강조했다.


최치원은 사후 1,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ㆍ중 우호 증진과 문화 교류 촉진의 상징적선각자(원조)로 급부상하고 있다. 2025년 광주 방문의 해를 맞아 한ㆍ중 문화 교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고운의 사상과 얼이 살아 숨 쉬는 남구 관내 지산재를 중심으로 주변 문화관광자원과 연계한 다시 가고 싶고, 다시 찾고싶은 방향으로 획기적인 관광자원 사업화 방안을 강구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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